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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서버 증설 작업을 진행하던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습니다. 장비 자체는 멀쩡했는데, 건물 전력 용량이 부족해서 시스템 전체가 멈춰버린 겁니다.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기술보다 그 기술을 받쳐주는 '기반'이 먼저라는 것을. 최근 정부가 발표한 미래성장동력 7대 SEED 보고회를 접하면서, 그 경험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AI 시대의 진짜 승부처는 알고리즘이나 모델 성능이 아니라, 전력망과 창업 생태계라는 두 축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력망이 흔들리면 AI도 멈춘다

AI 데이터센터 한 곳이 소비하는 전력량은 어마어마합니다. 소규모 도시 하나가 쓰는 전기를 단일 시설이 잡아먹는 구조인데, 문제는 이 수요가 앞으로 더 빠르게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반도체 팹, 로봇 공장, AI 연산 클러스터가 동시에 돌아가는 미래를 상상하면, 현재의 중앙집중식 송전망으로는 버텨내기가 어렵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바로도,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최첨단 장비를 들여다 놓아도 안정적인 운용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번 보고회에서 분산형 전력망(Distributed Energy Grid) 이야기가 나왔을 때 고개를 세게 끄덕이게 됐습니다. 분산형 전력망이란? 중앙의 대형 발전소에서 전기를 내려보내는 방식 대신, 각 시설이나 지역이 자체적으로 전력을 생산·저장·제어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정전이 나도 옆 구역은 멀쩡하게 돌아가는 그림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드 포밍 인버터(Grid-Forming Inverter)입니다. 이는 외부 전력망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전압과 주파수를 생성해 독립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게 하는 하드웨어로, 태양광이나 배터리 기반의 분산 에너지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핵심 설비입니다. 소프트웨어적인 AI 제어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이 물리적 기반이 함께 깔려야 진짜 분산형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는 이 부분이 정책 논의에서 다소 저평가받고 있다고 봅니다.

에너지 안보와 핵심 광물의 딜레마

분산형 에너지 체계를 구축하려면 배터리, 인버터, 전력 변환 설비가 대규모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만드는 데 쓰이는 핵심 광물(Critical Minerals)의 공급 구조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핵심 광물이란? 리튬, 코발트, 희토류처럼 첨단 산업과 에너지 전환에 필수적이지만 매장 및 생산이 특정 국가에 집중된 자원을 의미합니다.

 

현실적으로, 국내 배터리·전력 설비에 들어가는 다수의 핵심 광물은 특정 국가 의존도가 80~90%에 달합니다. 이 수치가 단순한 공급망 리스크가 아닌 안보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서둘러 대응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산형 전력망을 아무리 잘 설계해도, 그 설비를 만드는 재료가 언제 막힐지 모른다면 그 위에 쌓아올린 모든 것이 취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번 보고회에서 언급된 대응 방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해외 광산과의 장기 계약 및 복수 공급선 확보
  • 공공 비축 물량 확대 및 전용 비축 기지 가동
  • 폐자원 재활용(도시 광산화)을 통한 국내 순환 체계 구축
  • 핵심 소재·부품·장비에 5년간 10조 원 이상 집중 투자

다만 이 중 폐자원 재활용률을 현재 7%에서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수거 체계와 처리 인프라가 동시에 갖춰지지 않으면 공허한 숫자로 끝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정책 목표와 현장 실행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인프라'에서 발생했습니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연구실에서 시장으로: 기술 창업의 현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고회에서 전력이나 소재 못지않게 강하게 강조된 것이 바로 '창업 교육의 혁신'이었으니까요. 카이스트(KAIST) 총장이 직접 나서 "중국 대비 학생 창업 비율이 10분의 1 수준"이라고 언급한 대목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100명 중 한 명만 창업에 도전한다는 얘기인데, 이 수치가 개선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연구 성과가 나와도 산업화로 이어지는 경로가 막혀버립니다.

 

여기서 딥테크 창업(Deep Tech Startup)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딥테크 창업이란? AI, 양자, 바이오, 에너지 등 기초과학 기반의 원천기술을 핵심으로 하는 기업 창업을 의미합니다. 일반 IT 스타트업과 달리, 손익분기점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훨씬 길고 초기 자본 소요도 막대해서 민간 투자만으로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주변에서 목격한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논문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시제품 제작 자금이 없어서 기술이 서랍 속에 묻히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연구실 안에서의 성공이 시장의 제품으로 이어지려면, 기술 외적인 지원과 연결망이 필수라는 것을 저는 그 현장에서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이번 보고회에서 출자형 투자 R&D와 특수목적법인(SPC) 방식의 민관 협력 모델이 거론된 것은, 그 간극을 채우려는 시도로 읽혔습니다.

창업 생태계가 바뀌려면 '엄마'부터 설득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저는 보고회 발언 중 가장 현실적인 발언을 꼽고 싶습니다. "제일 중요한 게 엄마들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한 마디입니다.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기술 창업이 대중화되지 못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창업=위험'이라는 사회적 인식에 있습니다. 연구자가 창업에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구조가 없으니, 뛰어난 인재들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을 선택합니다.

 

창업 마인드셋(Entrepreneurial Mindset)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 개념은 기회를 포착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자원을 조합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으로, 단기 특강이 아니라 초중고 단계부터 반복 노출을 통해 형성됩니다. 보고회에서 "초중고 학생부터 전주기적 창업 교육"을 강조한 것도 이 맥락입니다.

 

다만 제가 우려하는 지점은 '창업 건수 늘리기'로 변질될 가능성입니다. 중국과의 창업 비율 비교 자체는 의미 있는 지표이지만, 숫자를 채우려는 유인이 생기면 내실 없는 창업이 양산될 수 있습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창업 이후 스케일업(Scale-Up), 즉 초기 단계를 넘어 시장에서 지속 성장하는 단계를 지원하는 결합형 펀딩과 장기 모험자본 구조입니다. 현재 한국의 벤처 투자 생태계는 단기 회수를 전제로 설계된 경우가 많아, 5~10년을 바라보는 딥테크 창업에는 구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출처: 중소벤처기업부).

 

AI 시대의 진짜 경쟁은 누가 더 좋은 모델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그 모델을 굴릴 전력을 어디서 안정적으로 가져오느냐, 그리고 그 기술을 시장에 꺼내놓을 창업자를 얼마나 키워내느냐에서 결판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 보고회가 그 방향을 제대로 짚었다고 저는 봅니다. 다만 정책의 선언과 현장의 실행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습니다. 분산형 전력망 전환은 한국전력 중심의 시장 구조 개편 없이는 공회전할 수 있고, 창업 생태계 혁신은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치상의 창업 건수만 늘리는 결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선언보다 설계가 중요한 시점입니다.


참고: 유튜브 채널 <KTV 국민방송> - 첨단기술이 여는 미래 / 미래성장동력 '7대 SEED' 보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