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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데이터센터 회사가 변압기 하나를 주문했더니 납품 예정일이 5년 후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처음 이 얘기를 접했을 때 솔직히 '설마'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이게 단순한 공급망 문제가 아니라는 게 보입니다. AI 시대의 몸통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나라가 어딘지, 그 현실이 숫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HBM — '돈 먹는 하마' 팀이 AI 시대의 심장을 쥔 이야기

2015년 무렵 SK 하이닉스 내부에서 HBM(High Bandwidth Memory) 개발팀은 사내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HBM이란? 반도체 칩을 수평으로 넓게 까는 대신 수직으로 여러 층 쌓아 올린 뒤, 층과 층 사이에 수천 개의 초고속 통로를 뚫어 데이터를 번개처럼 오가게 만든 고대역폭 메모리입니다. 쉽게 말해 평지에 단층 상가를 짓는 게 일반 D램이라면, HBM은 같은 땅에 고층 건물을 올려 처리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구조입니다.

 

문제는 이게 만들기가 지옥처럼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칩을 높이 쌓으면 열 때문에 미세하게 휘는 현상이 생기는데, 머리카락보다 가는 통로 하나만 어긋나도 칩 전체가 불량품이 됩니다. 개발팀은 수천 장의 웨이퍼를 깨뜨려가며 칩 사이에 특수 소재를 부어 넣어 열도 잡고 접합도 단단히 하는 독자 공법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사업을 접자는 말이 내부에서 실제로 나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도 현업에서 비슷한 경험을 해봤습니다. 새 시스템을 도입할 때마다 주변에서는 "그게 과연 돈이 되겠냐?"는 시선이 먼저였습니다. 제가 직접 부딪혀보니 초기의 그 적응 비용과 불확실성은 결국 나중에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노하우가 됐습니다. SK 하이닉스의 그 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시기 경쟁사는 매출 비중이 작다는 이유로 HBM 관련 조직을 대폭 줄이고 핵심 인력을 일반 D램 쪽으로 돌렸습니다. 당장의 실적표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처럼 보였겠죠.

 

그 선택의 결과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AI용 GPU에 넣을 초고속 메모리 공급사를 결정하는 순간 갈렸습니다. GPU란? AI 연산을 담당하는 핵심 반도체로, 아무리 빠른 GPU라도 메모리가 데이터를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병목이 생깁니다. HBM은 이 병목을 없애기 위해 GPU 바로 옆에 붙어 대동맥처럼 데이터를 쏟아붓는 부품입니다. 벼랑 끝에서 독자 공법을 완성해 둔 SK 하이닉스가 이 시험을 통과했고, HBM 공급권을 거머쥐었습니다.

 

그 결과가 2024년 실적에 고스란히 찍혔습니다. SK 하이닉스는 연간 매출 66조 원, 영업이익 23조 원을 넘겼고, 4분기 영업이익률은 41%에 달했습니다(출처: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 물건 100원어치를 팔면 41원이 이익으로 남는다는 얘기입니다. 한때 '돈 먹는 하마'라 불리던 팀이 회사 전체를 먹여 살리는 구조가 된 겁니다.

 

  • HBM: 반도체 칩을 수직으로 쌓아 초고속 데이터 전송을 구현한 고대역폭 메모리
  • SK 하이닉스, 독자 열 관리 공법으로 엔비디아 AI 반도체 HBM 공급권 확보
  • 2024년 4분기 영업이익률 41% — 웬만한 업종에서 10%도 쉽지 않은 수치
  • 경쟁사의 HBM 조직 축소 결정이 불과 몇 년 만에 잔혹한 성적표로 돌아온 사례

📌 HBM 요약

  • '돈 먹는 하마' 소리를 들으면서도 독자 공법을 완성한 팀이, AI 시대의 핵심 부품 시장을 선점했습니다. 단기 실적보다 긴 호흡이 결국 더 두꺼운 방패가 됐습니다.

 

변압기와 원천기술 — 소프트웨어는 복사되지만 쇠덩이는 복사되지 않는다

미국이 AI 데이터센터를 폭발적으로 늘리면서 전력망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미국 송전망의 약 70%가 설치된 지 25년이 넘은 노후 설비이고, 대형 변압기의 평균 연령은 40년을 넘겼습니다(출처: 미국 에너지부(DOE)). 전기 수요는 폭발하는데 그 전기를 보낼 핏줄이 이미 녹슬어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765kV급 초고압 변압기가 왜? 중요한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765kV란? 765,000볼트의 전압으로 전기를 송전하는 기술 규격으로, 기존에 많이 쓰이던 345kV 방식보다 같은 거리를 보낼 때 전력 손실을 대폭 줄여줍니다. AI 데이터센터처럼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빨아들이는 시설에는 이런 초고압 변압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걸 제때 만들지 못합니다. 그 사이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일진전기 등 이른바 K-변압기 회사들의 수주 잔고는 합산 20조 원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몇 년 뒤까지 공장 일감이 이미 꽉 찬 겁니다. HD현대일렉트릭의 경우 2025년 연간 영업이익이 약 1조 원에 육박하며 전년 대비 48% 이상 뛰었고, 미국발 수주 비중이 절반을 넘겼습니다.

 

이 문제는 변압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두산에너빌리티 공장에는 세계 최대 규모인 17,000톤짜리 단조 프레스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단조 프레스란? 거대한 쇠덩어리를 초고압으로 눌러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내는 설비로, 성인 남성 24만 명이 동시에 짓누르는 힘에 맞먹습니다. 원자로의 핵심 부품인 압력 용기는 이음새 없이 통째로 찍어내야 하는데, 미국은 이 대형 단조 능력을 1980년대 이후 사실상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세운 테라파워를 비롯한 미국 원전 기업들이 핵심 부품을 만들려고 창원으로 향합니다. 설계는 미국, 제조는 한국이라는 구도가 실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제 경험상 이론으로 익힌 지식은 금세 휘발됩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직접 손으로 다루고 실패를 몸으로 겪어낸 노하우는 시장이 뒤집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창원 공장의 17,000톤 프레스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닙니다. 수십 년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손끝의 감각입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마냥 낙관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한국이 HBM을 만들고 원자로 부품을 찍어내는 건 사실이지만, GPU의 핵심 설계도와 원자로의 기본 도면은 여전히 미국 회사가 쥐고 있습니다. 가장 잘 만드는 나라와 설계 자체를 소유하는 나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창원 공장의 프레스를 돌리고 연구소를 채우는 숙련 인력이 은퇴한 뒤 그 자리를 누가 채울지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기계는 살 수 있어도, 그 기계를 다룰 손은 하루아침에 키워지지 않습니다.

📌 변압기 및 제조 노하우 요약

  • 소프트웨어는 복사되지만 수십 년 쌓아온 제조 노하우는 복사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변압기와 단조 기술이 AI 인프라의 병목을 쥔 이유입니다. 단, 원천기술 종속과 인력 공동화라는 실금은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HBM이 일반 D램보다 비싼 이유가 뭔가요?

A. HBM은 칩을 수직으로 쌓고 층과 층 사이에 수천 개의 초미세 통로를 뚫어야 합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이 통로가 하나라도 어긋나면 칩 전체가 불량이 되기 때문에 수율 확보 자체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만들기 어려운 만큼 가격 프리미엄도 일반 D램보다 수 배 높게 붙습니다.

 

Q. 미국은 왜 변압기를 스스로 못 만드나요?

A. 미국 제조업의 GDP 비중은 1980년대 20%를 넘겼지만 지금은 10%대 초반으로 반토막 났습니다. 용접공, 대형 설비 기술자 같은 숙련 인력이 수십 년에 걸쳐 사라진 결과입니다. 설계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 설계를 실물로 구현할 손이 없다는 게 냉혹한 현실입니다.

 

Q. 한국의 제조 경쟁력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A. 낙관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은 라피더스를 통해 첨단 반도체 부활을 노리고 있고, 미국도 자국 내 반도체 공장 확대에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이공계 기피 현상이라는 인력 문제도 안고 있어, 지금의 경쟁력이 자동으로 유지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Q. SMR(소형 모듈 원전)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은 뭔가요?

A. SMR이란? 기존 대형 원자력발전소를 소형화해 공장에서 부품처럼 제작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는 차세대 원전을 말합니다. 테라파워의 나트륨 냉각 원전 프로젝트에서 두산에너빌리티가 핵심 단조 부품을, HD현대가 원자로 용기를 맡고 있습니다. SK와 SK이노베이션은 테라파워에 2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해 대주주에 오른 상태입니다.

결론

제가 현업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시장이 알아주기 전에 묵묵히 실패를 끌어안았던 시간이 결국 남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진짜 경쟁력이 된다는 겁니다. SK 하이닉스가 HBM 암흑기를 버텼던 것도, 두산 창원 공장이 수십 년간 프레스를 돌렸던 것도 그 맥락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한국 만세'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원천기술은 여전히 남의 손에 있고, 숙련 인력은 줄고 있으며, 경쟁국은 뒤쫓아오고 있습니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잡은 것과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참고: 유튜브 채널 <스탠딩온> - 포브스 "한국이 새로운 초강대국" 전세계가 한국에 매달리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