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저는 오랫동안 '한 분야를 깊게 파는 것'이 최고의 생존 전략이라고 믿었습니다. 커피 로스팅을 하든, 유통을 하든, 한 우물만 파면 언젠가 빛날 거라고요. 그런데 AI가 수십 년치 전문 지식을 단 몇 초 만에 뱉어내는 걸 직접 경험하고 나서,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 지식의 가치가 0에 수렴한다'는 말, 처음엔 과장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꽤 현실적인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 경계인이란 무엇인가? — 메뚜기가 인재가 된 시대
'경계인(Boundary Spanner)'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경계인이란? 원래 사회학에서 두 문화 사이에 끼어 있는 이민자나 교포를 가리키던 말인데, 이를 커리어에 적용하면 '여러 산업과 직무를 넘나들며 경험을 쌓은 사람'을 뜻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을 '메뚜기', '끈기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는 말에 저도 순간 뜨끔했습니다. 제가 딱 그런 경로를 걸어왔거든요.
저도 처음엔 로스팅 기술자에서 출발했다가, 기계 엔지니어링, 카페 유통, 디지털 마케팅, 자동화 플랫폼으로 영역을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주변에서 "또 새로운 거 하냐?"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때는 좀 민망했는데, 이제 와서 보면 그 이종 경험들이 제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LLM(Large Language Model), 즉 대규모 언어 모델의 등장이 있습니다. LLM이란?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해 사람처럼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AI 모델을 말합니다. 월 2만 원짜리 LLM 서비스에 수천 개의 질문을 던지면 질문당 비용은 사실상 0에 가까워집니다. 그 답변의 품질이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이처럼 전문 지식의 희소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여러 분야를 연결하는 '경계인'의 가치가 부상하고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각에 꽤 동의하는 편입니다.
- 경계인: 다양한 산업과 직무를 넘나들며 이종 경험을 연결하는 사람
- LLM 확산으로 단일 전문 지식의 희소 가치는 빠르게 하락 중
- AI가 '통계적으로 가장 가능성 높은 연결'을 한다면, 인간은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것들의 연결'로 차별화 가능
- 두레박형 인간: 여러 우물에서 지식을 길어 연결하는 창의적 인재상 (이어령 교수 제시 개념)
📌 경계인과 AI 시대의 인재상 핵심 요약
- 지식 가치 변화: LLM의 등장으로 단일 전문 지식의 대중화 및 가치 하락
- 새로운 인재상: 한 우물만 파는 전문가보다 이종 영역을 연결하는 '경계인'의 부상
- 인간만의 차별점: AI가 못하는 전혀 연관 없는 분야 간의 창의적 도약과 연결
2. 탈학습 — 성공 경험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경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역량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메타인지, 적응력, 계산된 리스크 감수, 이종 연결 능력, 그리고 호기심입니다. 이 중에서 제가 가장 무릎을 치게 된 개념은 '탈학습(Unlearning)'이었습니다.
탈학습이란?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이나 지식을 의도적으로 내려놓고, 새로운 환경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합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한번 성공한 경험은 뇌에 깊은 신경 경로를 만들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보다 잘했던 것을 버리는 게 훨씬 더 어렵다고 합니다. 범죄도시 시리즈로 알려진 허명행 감독이 스턴트맨에서 무술 감독을 거쳐 연출가로 전환할 때, 자신이 가장 잘하는 '액션'을 내려놓고 '서사와 인물'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운 것이 바로 탈학습의 실제 사례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프라인 유통과 로스팅에서 꽤 성과를 냈던 터라 당연히 통할 줄 알았는데, 그 방식을 디지털 환경에 그대로 적용하려다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통하던 '관계 중심 영업'이 온라인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았거든요. 결국 제가 잘한다고 믿었던 방식을 스스로 의심하고 내려놓으면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 Learning & Memory에 따르면, 기존 학습 패턴을 억제하고 새 패턴을 형성하는 인지적 유연성(Cognitive Flexibility)은 훈련을 통해 강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지적 유연성이란 상황 변화에 따라 사고방식 자체를 전환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탈학습은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 훈련이 필요한 근육이라는 뜻입니다.
📌 탈학습(Unlearning) 핵심 요약
- 개념 정의: 과거 성공 경험과 지식을 의도적으로 내려놓고 새 규칙을 수용하는 능력
- 뇌과학적 난제: 새로운 학습보다 기존의 익숙한 성공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이 훨씬 난이도 높음
- 인지적 유연성: 의지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의식적 반복 훈련을 통해 단련되는 인지 근육
3. 틱데이터 — 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진짜 이유
빅데이터(Big Data)는 방대한 양의 행동 데이터를 모아 패턴을 발견하는 분석 방법입니다. '여름엔 이쪽으로 걷고, 겨울엔 저쪽으로 걷는다'는 패턴은 보여주지만,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왜?'를 찾는 것이 틱데이터(Thick Data)입니다. 틱데이터란? 인류학적 참여 관찰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의 숨겨진 동기와 맥락을 파악하는 질적 데이터 수집 방법을 말합니다.
레고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닌텐도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은 레고는 처음에 빅데이터 분석 결과만 믿고 '아이들은 단순하고 캐릭터 있는 것을 원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립 난이도를 낮추고 캐릭터를 강화했는데, 오히려 매출이 더 떨어졌습니다. 제 역시 현장에서 느낀 바이지만, 많은 기업들이 숫자와 통계만 보고 소비자의 진짜 마음을 놓치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레고는 인류학자를 투입해 아이들의 놀이 현장을 직접 관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낡고 앞코가 닳아빠진 운동화 한 켤레가 결정적인 인사이트를 줬습니다. 스케이트보드 기술인 플립(Flip)을 수천 번 연습하다 닳은 신발이었는데, 아이에게 진정한 놀이란? '쉬운 것'이 아니라 '도전할 수 있고, 숙련도를 자랑할 수 있으며, 내 지위를 높여주는 경험'이었던 겁니다. 레고는 전략을 180도 뒤집어 4,295개 부품짜리 런던 브리지 같은 고난도 제품으로 돌아섰고, 이후 어른들을 위한 아키텍처 시리즈까지 출시해 미국 박물관에 전시되는 수준의 문화로 성장시켰습니다.
출처: Harvard Business Review — Small Data & Ethnographic Research에서도 "소비자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빅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하며, 현장 관찰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AI는 통계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연결만 합니다. 그래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점을 연결하는 인간의 창의적 도약, 그것이 AI와 차별화되는 핵심 지점이라는 시각이 있는데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 틱데이터(Thick Data)와 맥락 이해 핵심 요약
- 빅데이터의 한계: 수치화된 패턴은 보여주지만 행동의 근본적인 '이유(Why)' 설명 불가
- 틱데이터 관점: 현장 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사용자의 심리, 맥락, 숨겨진 동기 포착
- 레고의 부활 사례: 통계적 접근 실패 후 깊은 인간적 맥락 파악을 통한 대역전 성과
4. 자주 묻는 질문
Q. 경계인이 되려면 무조건 이직을 많이 해야 하나요?
A.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이직 횟수보다는 '서로 다른 맥락을 연결하는 경험'이 핵심입니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마케팅팀에서 기획팀으로, 영업팀에서 데이터팀으로 이동하며 이종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직은 그 경험을 빠르게 압축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
Q. 탈학습이 어렵다는 건 알겠는데, 실제로 어떻게 시작하면 되나요?
A. 가장 쉬운 시작점은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방식'에 의문 부호를 붙여보는 것입니다. "이게 원래 이렇게 하는 거니까"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 탈학습의 신호입니다. 그다음에 전혀 다른 업계의 사람과 대화하거나, 현재 방식과 반대되는 성공 사례를 일부러 찾아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Q. 새로운 시도를 위해 20%의 여유(딴짓)를 두라고 하지만, 막상 여유가 생기면 유튜브나 SNS만 보게 되지 않나요?
A. 아주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단순히 시간적 유여만 만든다고 해서 창의적인 생각이나 새로운 시도가 저절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스마트폰이나 SNS 같은 즉각적인 도파민 자극원으로부터 잠심 떨어지는 "환경 설계"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런 자극 없이 온전히 심심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비로소 뇌가 새로운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이종의 경험을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Q. AI는 정말 호기심이 없나요?
A. AI 서비스에 직접 물어보면 "진정한 호기심은 없다, 알고리즘으로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답한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호기심은 답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즐기는 감정적 상태인데, AI는 확률적 예측으로 그것을 흉내 낼 뿐 내면에서 궁금함이 발생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 점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차별점 중 하나로 보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단순히 시간적 여유만 만든다고 해서 창의적인 생각이나 새로운 시도가 저절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스마트폰이나 SNS 같은 즉각적인 도파민 자극원으로부터 잠시 떨어지는 '환경 설계'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런 자극 없이 온전히 심심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비로소 뇌가 새로운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이종의 경험을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5. 결론
정리하면, AI 시대의 생존은 더 많이 아는 것보다 '더 넓게 연결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전문 지식의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는 지금, 경계인처럼 이종 경험을 축적하고, 탈학습으로 과거의 성공을 내려놓으며, 틱데이터적 관찰력으로 사람의 맥락을 읽는 능력이 진짜 경쟁력이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직장을 그만두거나 전공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의문을 품고, 전혀 다른 분야의 책 한 권을 읽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그렇게 조금씩 경계를 넓혀왔고, 그 작은 이탈들이 쌓여 지금의 연결이 만들어졌습니다.
참고: 유튜브 채널 <경제왕개미> -학부모, 청년 필수 시청! 구글, 넷플릭스 출신이 말하는 AI 시대 생존법 (백영재)- [출처: 매불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