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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일본이 불화수소 수출을 막겠다고 발표했을 때 저는 솔직히 '이번엔 진짜 위험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국내 기업들이 자체 양산 체제를 갖추고, 오히려 일본 기업들이 시장을 잃는 상황을 보면서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ASML 장비를 둘러싼 변화를 들여다보니 그때와 똑같은 패턴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 34일짜리 행정 병목이 사라진 날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는 지인한테서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장비 한 대가 인천공항에 내려앉고 나서 실제 가동까지 한 달 가까이 손 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게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극자외선 노광장비, 즉 EUV(Extreme Ultraviolet Lithography)는 파장이 13.5나노미터에 불과한 극자외선으로 웨이퍼 표면에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1 수준 회로를 새기는 장비입니다. 쉽게 말해 초정밀 도장 기계인데, 이 도장 기계 안에 액체 주석을 분사하는 고압가스 압축 시스템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국내법상 '고압가스 일반 제조 시설'로 분류돼 있었습니다. 덕분에 장비를 설치할 때마다 기술 검토 15일, 중간 검사, 완성 검사를 순서대로 통과해야 했고, 이 절차에만 꼬박 34일이 걸렸습니다.

 

첨단 공정 경쟁이 며칠 단위로 승부가 갈리는 시장에서, 장비는 이미 완성돼 있는데 행정 절차 때문에 한 달을 날리는 셈이었습니다. 제가 자료를 처음 확인했을 때 든 감정은 답답함보다는 일종의 허탈함에 가까웠습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거니까요.

2026년 6월,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관련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습니다. EUV 장비를 '특정 설비'로 재분류하면서 중간 검사를 아예 생략하고, 기술 검토 기간도 15일에서 2일로 단축한 것입니다. 대신 3년 주기 공장 심사와 종합 공정 검사로 안전성을 사후 관리하는 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체 소요 기간이 34일에서 9일로, 최대 25일이 단축됐습니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네덜란드 장비 자체를 안 쓰게 됐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장비를 쓰는 속도에 걸려 있던 국내산 병목 하나를 우리 손으로 풀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차이가 작아 보여도, 경쟁사보다 한 달 빨리 라인을 돌릴 수 있다는 건 실제 수주 협상 테이블에서 전혀 다른 무기가 됩니다.

📌 EUV 행정 규제 완화 요약

  • 기존 행정 병목: EUV 장비의 고압가스 시설 분류로 인해 도입 후 가동까지 34일 소요
  • 제도 개정 내용: 장비를 '특정 설비'로 재분류하여 중간 검사 생략 및 기술 검토 단축
  • 검사 기간 단축: 법적 검사 기간이 34일에서 9일로 줄어들어 최대 25일 단축 효과 발생
  • 라인 가동 속도 향상: 첨단 반도체 라인의 초기 가동을 앞당겨 수주 경쟁력 확보

 

2. 후공정이 진짜 전장이 된 이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반도체 경쟁력 이야기는 거의 전공정 얘기였습니다. 회로를 얼마나 미세하게 새길 수 있느냐, 그러니까 몇 나노 공정이냐가 기업 가치를 좌우하는 척도처럼 통용됐으니까요. 저도 그 프레임 안에서 뉴스를 읽어왔습니다. 그런데 AI 반도체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면서 이 구도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핵심은 HBM(High Bandwidth Memory), 즉 고대역폭 메모리입니다. 여기서 HBM이란? 얇게 만든 D램 칩 여러 장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하나의 패키지로 묶은 메모리를 말합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처럼 데이터를 엄청난 속도로 처리해야 하는 칩 옆에 붙어서 병목 없이 데이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이걸 만드는 기술이 EUV처럼 회로를 얼마나 미세하게 새기느냐보다, 칩을 얼마나 정밀하게 쌓고 접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 영역을 후공정이라고 부릅니다. 전공정이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기는 단계라면, 후공정은 그렇게 완성된 칩을 잘라내고 쌓고 검사해서 최종 제품으로 묶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제가 자료를 더 들여다보면서 진짜 놀랐던 건, 국내 후공정 장비 기업들의 이름이 이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하나둘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칩을 얇게 갈아내는 백그라인딩 장비, 여러 층의 칩을 열과 압력으로 붙이는 TC 본딩(Thermo-Compression Bonding) 장비, 완성된 패키지의 전기적 특성을 검사하는 테스트 핸들러까지. 이 장비들은 EUV만큼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지만, HBM의 수율과 성능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입니다. 2019년 소부장 사태 이후 꾸준히 저력을 쌓아온 국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가 이번에는 후공정이라는 또 다른 무대에서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균관대학교 반도체 화학공학 전공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EUV가 독점하고 있는 영역이야말로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기 가장 좋은 환경"이라며, 한국 기업들이 단순한 시장 점유율 방어를 넘어 AI 추론 시장에서 메모리의 역할 자체를 확장하는 기술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도 이 관점에 동의합니다. 후공정 기술 주도권을 쥐는 것은 단지 현재 수익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 반도체 시장의 판을 어떻게 짜느냐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 후공정 중심 패러다임 전환 요약

  • AI 반도체의 핵심: 회로 미세화(전공정)를 넘어 HBM 적층·접합 기술(후공정)이 핵심으로 부상
  • 핵심 후공정 장비: 백그라인딩, TC 본딩, 테스트 핸들러 등 수율 결정 요소 확충
  • 국내 소부장 생태계 성장: 국산 후공정 장비 기업들이 글로벌 HBM 공급망 진입 확대
  • 차세대 주도권: 후공정 핵심 기술 확보를 통한 차세대 AI 메모리 시장 판도 주도

 

3. 위기를 기회로 바꾼 소부장 전략의 다음 단계

2019년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건 단순한 회고가 아닙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뿌리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이 수출을 막은 품목은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세 가지였습니다. 불화수소란? 반도체 웨이퍼 식각 공정에서 불필요한 막을 녹여내는 데 쓰는 핵심 소재로, 순도가 높을수록 회로 선폭을 더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일본 의존도는 상당했고, 규제 발표 직후 업계 분위기는 꽤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료를 다시 확인해보니 결과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규제 발표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국내 소재 기업이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 시설을 두 배로 확장했고, 2021년 초에는 5N급(99.999% 순도) 불화수소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불화폴리이미드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이 자체 양산 설비를 갖춰 오히려 중국으로 수출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같은 기간 한국 수출액이 전년 대비 75% 이상 줄었고, 연간 60억 엔 규모의 손실을 떠안았습니다(출처: 산업연구원(KIET)).

 

규제로 상대를 조이려던 쪽이 오히려 시장을 잃은 겁니다. 이 경험이 지금 한국 반도체 전략의 밑그림이 됐습니다.

 

지금 한국이 취하고 있는 방향은 크게 세 갈래로 정리됩니다. 전공정에서는 여전히 ASML 장비를 쓰되 국내 제도 개선으로 도입 속도를 끌어올리고, 후공정에서는 HBM 중심의 독자 경쟁력을 키우며, 소재·부품 영역에서는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지속적으로 줄여 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곳이 막혀도 전체 라인이 멈추지 않도록 여러 겹의 안전판을 만드는 전략입니다.

 

물론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차세대 초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High-NA EUV에 대한 의존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High-NA EUV란 기존 EUV보다 개구수(렌즈 성능을 나타내는 수치)를 높여 해상도를 약 70% 향상시킨 차세대 노광장비로, 대당 가격이 5,500억 원에 육박합니다. 아무리 행정 절차를 단축하고 후공정 기술을 고도화해도 이 장비 자체를 확보하지 못하면 선단 공정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또한 미국이 자국 데이터센터용 메모리의 현지 생산 의무화를 추진할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기술 경쟁뿐 아니라 복잡한 지정학적 셈법까지 동시에 풀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 다층적 반도체 안전판 전략 요약

  • 소부장 극복 선례: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후 불화수소 등 국산화 성공 및 공급망 강화
  • 3대 다층 전략: 전공정 인허가 속도 개선 + 후공정 HBM 기술 고도화 + 소재 다변화
  • 선단 공정의 과제: High-NA EUV 장비 확보 필요성 등 여전한 핵심 기술 의존도
  • 글로벌 지정학 리스크: 미국 현지 생산 요구 등 외부 변수에 대비한 회복력 구축 필요

 

4. 자주 묻는 질문

Q. 한국이 ASML 장비 없이도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된 건가요?

A.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여전히 ASML의 EUV 장비를 사용합니다. 달라진 것은 그 장비를 도입하고 가동하기까지의 국내 행정 절차가 34일에서 9일로 단축됐다는 점, 그리고 후공정과 소재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쟁력이 생겨 단일 병목에 모든 것을 거는 구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Q. HBM이 왜 갑자기 이렇게 중요해진 건가요?

A. 엔비디아 같은 AI 가속기 칩은 연산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데이터를 공급하는 메모리가 병목이 됩니다. HBM은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전송 대역폭을 수십 배 끌어올린 제품으로, AI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 됐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Q. 중국도 DUV 장비로 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있나요?

A. DUV(Deep Ultraviolet) 장비, 즉 심자외선 노광장비를 여러 번 반복 사용하는 멀티 패터닝 방식으로 4세대 D램 수준까지는 접근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다만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수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한계가 있어, EUV 없이 최첨단 노드를 안정적으로 양산하기는 현재로선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입니다.

 

Q. 소부장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A. 소부장은 소재·부품·장비의 줄임말로,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이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표현입니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화학 소재, 각종 부품, 그리고 공정 장비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 분야의 자립도가 높을수록 외부 공급망 리스크에 덜 흔들리는 산업 구조를 갖게 됩니다.

5. 결론

제가 이번 자료를 정리하면서 계속 머릿속에 맴돈 단어는 '완전한 자립'이 아니라 '회복력'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장비를 영원히 안 써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한 곳이 흔들려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 구조, 위기가 닥쳤을 때 그걸 국산화와 다변화의 계기로 전환해온 이 나라 특유의 패턴이 이번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행정 병목을 스스로 찾아 풀어냈고, 후공정이라는 새로운 전장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소재·부품 의존도는 계속 낮아지고 있습니다. 반도체 뉴스를 볼 때 EUV와 ASML 프레임 너머에 있는 이 조용한 변화들을 함께 추적해보시길 권합니다. 숫자가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실제 판을 바꾸는 건 이런 흐름들이니까요.

 

참고: 유튜브 채널 <한지원TV> -"이럴 줄은 몰랐다" 네덜란드 장비 없이도 돌아가기 시작한 한국 반도체 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