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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 본더(TC Bonder) 시장 점유율 70%. 이 숫자 하나가 한미반도체라는 회사를 설명하는 데 사실 가장 정직한 지표입니다. 저는 솔직히 얼마 전까지 이 회사 이름을 제대로 기억조차 못했습니다. '한미'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미 제약이 먼저 떠오를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회사를 제대로 파고 들어가니, 제가 과거 커피 로스터로 일하며 느꼈던 '데이터 싸움'의 본질이 그대로 겹쳐 보였습니다.
올림픽대로 광고판 한 장이 말해주는 것
63빌딩 앞 올림픽대로변에 높이 10m짜리 대형 광고판이 있습니다. 월 임대료가 1억 원에 달하는 자리로, 웬만한 기업은 엄두도 못 낸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딱 두 가지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한미반도체 로고'와 'Since 1980'. 화려한 카피도, 제품 설명도 없습니다. 이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반도체 회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한미반도체는 완성 칩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 회사는 반도체 후공정(Back-end Process) 장비를 만드는 기업입니다.
후공정이란? 웨이퍼(Wafer), 즉 회로가 새겨진 실리콘 원판을 개별 칩 크기로 잘라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반도체 완성품 형태로 만드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전공정이 설계와 회로 인쇄라면, 후공정은 그것을 실제로 쓸 수 있게 완성하는 단계입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 회사를 종종 '한국의 ASML'이라고 부릅니다. ASML은 네덜란드 기업으로, 반도체 회로를 빛으로 새기는 노광(Lithography) 장비 분야에서 전 세계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가진 회사입니다. 한미반도체가 그 별명을 얻을 만큼 후공정 장비 분야에서 대체 불가한 위치에 있다는 뜻인데, 제가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이 회사를 제대로 다시 보게 됐습니다.
차고 창업에서 세계 1위까지, 창업 역사가 남긴 것
한미반도체의 시작은 1980년입니다. 창업주 곽노권 회장은 1966년 모토롤라 코리아에 입사해 반도체 후공정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그가 1979년 회사를 그만두고 차고 같은 작은 공장에서 시작한 것은, 당시 한국 반도체 산업이 미국과 일본제 장비를 사다가 조립만 하는 구조였다는 사실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손자로서 '사업 보국'이라는 경영 철학을 품고 있던 그에게, 이 상황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겠죠.
처음 만든 것은 몰드 공정(Mold Process) 핵심 부품인 캐비티바(Cavity Bar)였습니다.
몰드 공정이란? 반도체 칩을 외부 충격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에폭시 수지로 감싸는 패키징 공정입니다.
이걸 친정이나 다름없는 모토롤라에 납품하면서 첫 발을 뗐고,
국산화 소식이 퍼지면서 삼성전자, 현대전자, 금성반도체 등으로 수주가 이어졌습니다.
제가 커피 로스터로 일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해외 대형 로스터기를 그대로 쓰면서 매뉴얼대로만 작동했는데,
생두(Green Bean)마다 밀도가 다르고 당일 습도와 기온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걸 몸으로 배우는 데
약 1톤 가량의 생두를 가지고 공부를 했을 정도로 꽤 오래 걸렸습니다.
남이 만든 장비를 쓰면서 그 장비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비로소 '내가 직접 제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곽 회장이 차고에서 공구를 들었던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1997년에 출시된 소잉 앤드 플레이스먼트(Sawing & Placement)는 한미반도체의 역사에서 진짜 전환점이었습니다.
소잉(Sawing)이란? 웨이퍼를 개별 칩 단위로 정밀하게 절단하는 공정으로,
이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오류가 발생하면 웨이퍼 전체를 폐기해야 합니다.
한 장의 웨이퍼 값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 장비의 신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미반도체 장비를 도입한 업체들은 경쟁사 대비 생산량이 30% 증가했다는 평가가 실제 업계에서 나왔고,
이 숫자 하나가 회사를 시장에 각인시켰습니다.
2004년부터 21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 중인 마이크로 소 비전 플레이스먼트(Micro Saw Vision Placement)는 절단, 세척, 건조, 검사, 선별, 적재까지 여러 공정을 하나의 장비로 구현한 제품입니다.
이 장비가 반도체 제조 현장에서 필수재로 자리 잡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공정 통합이 곧 생산 속도이고, 생산 속도가 곧 돈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미반도체 공식 홈페이지
TC 본더, AI 시대가 만들어낸 게임 체인저
2016년 개발된 TC 본더(Thermal Compression Bonder)는 현재 한미반도체가 '슈퍼 을'로 불리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TC 본더란? 열(Thermal)과 압력(Compression)을 동시에 가해 반도체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접합시키는 장비입니다.
이 장비 없이는 HBM(High Bandwidth Memory), 즉 고대역폭 메모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HBM이란? 여러 장의 D램(DRAM) 칩을 수직으로 쌓고 실리콘 관통 전극(TSV, Through Silicon Via)으로 연결해 데이터 전송 속도를 극대화한 메모리 반도체를 뜻합니다.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수십 배 빠르기 때문에,
AI 연산에 필수적인 GPU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HBM 확보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 공정 설명을 읽으면서 커피 로스팅의 드럼 내부 온도 제어가 떠올랐습니다.
로스팅 과정에서 드럼 안의 온도는 초반과 후반이 다르고, 생두 투입 직후와 1차 크랙 이후의 화력 요구량이 완전히 다릅니다.
미세하게 다른 온도 커브를 층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원하는 맛이 나옵니다.
TC 본더가 HBM을 8단에서 12단, 16단으로 쌓아 올릴 때 층마다 다른 온도와 압력 데이터를 정밀하게 제어해야 한다는 설명은,
그 감각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느꼈습니다.
현재 TC 본더 시장에서 한미반도체의 점유율은 약 70%입니다.
SK 하이닉스뿐 아니라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인도에 신규 공장을 건설할 때도 한미반도체의 TC 본더가 채택됐습니다.
한미반도체가 이 분야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유지하는 핵심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많은 HBM 적층 공정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어, 불량률 예측과 수율 최적화 역량이 경쟁사 대비 월등합니다.
- 층수가 높아질수록 층마다 다른 열과 압력 제어가 필요한데, 이 데이터 자산은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습니다.
- 장비 처리 속도, 즉 단위 시간당 생산 가능한 칩 수에서 경쟁사와 명확한 격차가 있습니다. 대량 생산이 전제되는 반도체 산업에서 이 속도 차이는 치명적입니다.
- 2021년에는 핵심 소재인 소잉 블레이드(Sawing Blade)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해, 일본 의존도를 낮추면서 원가 경쟁력까지 확보했습니다.
반도체 분야 시장 조사 기관인 TechInsights에 따르면, HBM 수요는 AI 가속기 시장 성장과 함께 2027년까지 연평균 3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 수요 곡선 위에 한미반도체의 TC 본더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주가 프리미엄이 단순한 테마주 투기가 아닐 수 있다는 근거가 됩니다.
슈퍼 을의 이면, 곽동신 회장의 승부수와 리스크
곽동신 현 회장은 1998년 25세에 한미반도체에 입사해 2007년 대표이사에 올랐습니다. 창업주 아버지가 타계한 2023년이 반도체 시장의 극심한 불황기였음에도, 그는 자사주를 꾸준히 매입했습니다.
주가 방어 목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경영적 확신을 대외적으로 선언한 행동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팔란티어의 창업자 피터 틸의 펀드가 한미반도체에 투자해 수천억 원의 수익을 냈다는 사실도,
이 회사의 기술력이 글로벌 수준에서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2011년 삼성전자의 장비 계열사 세스(SEMES)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한 사건은 업계에서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